21세기의 연애를 딱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연애는 이벤트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세대 연인들은 이벤트 없는 연애란 팥 없는 찐빵 혹은 붕어빵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 ‘연애 이벤트’의 절정을 꼽으라면 단연 크리스마스가 일등 되겠다. 그야말로 싱글들은 두려움에 떠는 ‘그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거리엔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라는 구호 아래 ‘열광’하거나 ‘좌절’한 연인들이 넘쳐난다. 연애를 빙자해 세상이 이벤트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고결한 영적 결합”이라고 부르짖는 건 이런 크리스마스 시즌엔 금기마저 되버린다. 자칫하다간 고루한 철학의 소유자나 유행에 뒤떨어진 ‘노땅’으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야말로 ‘이벤트의 고전’. ‘이벤트 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책을 만든다면 첫 번째 사례로 들어갈 법한 내용이다. 가난한 부부 짐과 델라는 선물을 사기 위해 서로가 아끼던 것을 판다. 짐은 델라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빛나게 해줄 머리 빗을 사느라 할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를 팔아 버렸지만, 정작 델라는 짐의 시계줄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문장과 절묘한 상황으로 묘사된 걸작이다.

이 소설은 그러나 요즘 대한민국의 크리스마스에 맞춰 해석해 보면 의미가 약간 달라질 수도 있다. 연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선 머리카락이라도 팔아야 하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위해 가보까지도 내맡겨야 하는 남자가 지금 우리의 크리스마스 이벤트엔 필요한 것이다.

많은 연인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불 같은 연애를 ‘쫑’ 낸다는 조사결과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유가 대체 뭐냐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기대만큼 이벤트가 흡족하지 않으면, 그 불만은 바로 연애의 종말로 이어진다. 연애의 ‘피크’가 곧 헤어짐을 위한 ‘피크 타임’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위험한 확률 게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여전히 이벤트를 ‘사수’하려고 한다. 남자가 이벤트를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를 두고 사랑의 크기를 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벤트는 곧 ‘머니게임’이 된다. 평소 데이트 비용을 절반씩 나누어 내던 연인들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모든 부담을 거의 전적으로 남자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나. 남자들이 이벤트에 대한 위기의식을 더 심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여기까지 읽은 몇몇 여성들이 분노에 차서 내게 항변할 것이 뻔하다. “이봐요! 선물이나 이벤트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요. 얼마나 정성을 보여주는 지가 포인트죠!”

과연 그런가. 솔직해지자. 우린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정성을 보여주는 것’도 결국은 돈 문제로 직결된다는 것을. 돈이 곧 정성이고, 성의는 그 다음 문제라는 걸. 금전적으로 얼마나 여유 있는지에 따라 그 날 저녁 식사의 메뉴가 정해지고, 선물의 패키지가 결정되며, 귀가 시간에 지하철을 탈 것이냐 까만 택시를 탈 것이냐를 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제작비를 벽돌처럼 쌓아 만든다는 할리우드 블록 버스터가 흥행에 더 성공할 확률이 높겠는가, 소규모 인디 영화가 관객들을 모을 확률이 더 높겠는가. 크리스마스만 되면 카페들은 커피 값을 1만원도 넘게 가격을 매겨서 연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따블!”을 외치지 않으면 택시는 타기도 힘들다. 돈 없인 크리스마스 이벤트도 없는 셈이다.

몇 년 전 영국에서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는 이쯤에서 다시 들춰볼 만 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남자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출격직전에 겪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벤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일종의 투쟁 같다는 인상마저 들게 된다. 연애는 사라지고 오직 ‘지상 최대의 쇼를 하라’라는 광고 문구만이 귀에 맴돈다.

금년 크리스마스엔 이벤트 대신 ‘364일’ 동안 당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한 상대방에게 하루의 휴가를 주는 건 어떨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하루 동안 편안한 낮잠을 즐겨봐”라고 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이벤트가 아닐까?

스팅의 노래 ‘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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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종민